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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의롭고 당당한 남도 항일독립운동가 – 장성 출신 기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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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방활력연대 작성일 23-09-16 09:05 조회 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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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감히 그 푸른 절개를 눈물없이 기억하리 

의롭고 당당한 남도 항일독립운동가 기태룡

2023.09.07 전남새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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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있는 기태룡 선생의 묘


지금은 우리땅. 봉오리채 떨어진 환도 친형과 무등회 동지들의 항쟁으로 부활한 땅. 이제는 창허 기태룡도 그들 곁으로 떠나려 하는구나. 17세 홍안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독립항쟁-형극의 길, 옥고의 모진 상처, 역사의 증언 되니 누가 감히 그 푸른 절개를 눈물없이 기억하리, 자랑스런 대한의 아들이여! 광주 무등의 횃불이여!’

 

기태룡 선생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기태룡은 장성사람이다. 광주서중학교 재학 중인 19403월 선배 유몽룡의 소개로 동교의 항일학생결사 무등회에 가입하였다.

 

무등회는 1938년 조직됐던 서중독서회가 확대 개편한 것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을 목적한 결사였다. 그는 무등회 회원으로 동지 포섭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4210월 신병으로 휴학하고, 다음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예비학교, 신숙고등예비학교에 다녔다. 이후 하얼빈까지 왕래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임시정부를 찾은 기태룡은 김구와 이시영을 만났다.

 

김구와 이시영은 광주서중 학생이 상하이까지 왔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김구와 이시영은 독립의 뜻을 잃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고 격려하였다. 감격한 기태룡은 도쿄와 하얼빈에서 무등회 활동 자금으로 얻은 500원 중 480원을 이시영에게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기태룡은 부통령이던 이시영의 집에서 생활했다. 이시영은 그의 학비까지 대 주었다. 김구도 해방 이후 남행하면서 장성 기태룡의 집에서 이틀간을 묵으며 충효세가라는 친필 휘호를 써주었다.

 

귀국 후 교내에서는 박화진·배종국 등 5학년생 중심으로 교풍 쇄신운동을 표방하며 일제 식민통치에 대항했다. 그 활동이 일경에 탐지되어 주동학생들이 검속을 당했다. 광주서중 학생들은 이를 계기로 학병지원 반대, 창씨개명 반대, 일어상용 반대, 징병제도 반대 등을 내걸고 1943521일 일제히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광주서중의 제2차 독립운동으로 불리는 무등회 사건은 치열한 항일투쟁이었으며, 학생 비밀결사와 관련해 고문으로 숨진 대표적 사건이기도 했다.

 

기태룡도 무등회 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두 손이 뒤로 수갑 채워진 채 천장에 매달리는 비행기 고문을 당하였다. 한겨울 밤 꽁꽁 언 경양방죽에 알몸으로 처넣는 고문, 심지어는 쇠꼬챙이를 달궈 허리를 지져대는 고문까지 당했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기태룡은 1944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단기 2, 장기 4년의 형을 받았다.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기태룡은 1945년 해방 하루 전날 밤 출감했다.

 

기태룡은 1948년 광주서중학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1975년 장흥고등학교 교장, 1980년 담양군교육장, 1984년 전남교육연구원장을 지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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