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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코리안 정체성 형성, 정치에 달려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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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방활력연대 작성일 22-10-06 08:29 조회 1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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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정체성 형성, 정치에 달려 있다!

 

박현모 소장(세종리더십연구소)

2022.10.5. 세종이야기

 

1. ‘한국말에는 코리안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함재봉 원장이 한국사람 만들기I(2017)에서 인용한 어느 미국인 교수의 얘기다. 한국말로 남한에 사는 코리안들은 한국 사람이라 부르고, 북한에 사는 코리안들은 자신들을 조선 사람이라고 한다. 미국에 사는 코리안들은 재미교포라고 하고, 일본에 사는 코리안들은 재일동포라고 부른다. 중국에 사는 코리안들은 조선족이고, 중앙아시아에 사는 코리안들은 고려인이다. 한국말에는 영어의 코리안처럼 한국사람’, ‘조선사람’, ‘재미교포’, ‘재일교포’, ‘조선족’ ‘고려인을 총칭하는 단어가 없다(6).

 

함재봉 원장에 따르면, 코리안에 해당하는 한국말이 없는 이유는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 형성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 사람들은 19193·1운동을 즈음해 새 나라의 정체성 형성 문제로 고민했다. 그들은 유교변통에서 문명개화민족개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주에서 새로운 인간형을 모색했다. 일부는 빼앗긴 조선 반도를 뒤로 하고, 전 세계로 흩어져 새로운 이념과 사상, 정치공동체를 공부하고 새로운 종교로 개종하면서” “새 나라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체제와 인간형을 찾아나섰다. 하지만 1945년 광복 후 70여 년이 되도록 코리안을 가리키는 통합된 정체성은 형성되지 않았다. “나라를 잃었을 때나 되찾았을 때나 여전히 지정학적인 이유로 한반도에 개입하고자 하는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가 얽히면서, 되찾은 나라는 더욱 분열되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우리는 남-북으로, -우로, -서로 갈라졌다.”(13).

 

그러면 백 년간의 프로젝트’, 즉 공민왕 즉위(1351) 무렵부터 시작되어 태종과 세종에 의해 본격화된 유교 지식인들의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서 배울 점은 무엇인가? 그 전의 칼럼에서 밝힌 것처럼, ‘백 년간의 프로젝트는 세종이 사망하는 즈음(1450)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성과의 근거로는 여러 차례 인용했듯이, 고려 공민왕 때부터 세종시대까지 살았던 고려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유언을 들 수 있다. 길재는 죽으면서 아들 길사순에게 내가 고려에 마음을 바친 것처럼[我向高麗之心], 너는 네 조선의 군주(세종)를 섬겨야 한다[事汝朝鮮之主]”고 당부했다(세종실록 1/4/12). 고려시대에 태어난 자신은 고려인으로 죽지만, 다음 세대부터는 고려인이 아닌 조선사람으로 살라고 말한 것이다(박현모 2021).

 

 

2. 20세기와 21세기에 그런 것처럼, 14세기와 15세기에도 주변 국가들이 한반도 국가에 요구하는 사항은 녹록지 않았다. 원나라는 공민왕 대신 덕흥군을 새 왕으로 세우려 했고(1363), 홍건적은 수도 개경까지 침입해 공민왕으로 하여금 안동으로 피난 가게 만들었다(1361). 우왕 원년(1375) 이후 극심해진 왜구 침입은 조선 건국 후 태종 재위10(1410)에 이르기까지 종묘사직과 민생을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뿐 아니다. 신흥 패권국 명나라는 조선에서 보낸 외교문서 글귀가 예의에 어긋났다고 트집 잡아 정도전을 압송하라고 요구하는가 하면(1395표전문사건’) 젊은 여자와 나이 어린 환관, 그리고 1만 마리 단위의 소나 말을 일시에 보내라고 압박하곤 했다. 한마디로 백 년간의 프로젝트가 추진되던 그 시기도 대외적 시련이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행(李行)이나 길재 같은 고려인들이 아들에게 너는 네 조선의 군주를 섬기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종리더십연구소에서 수행한 한국연구재단 과제 백 년간의 프로젝트(1351-1450): 고려인은 어떻게 조선인이 되었나?”를 마무리 짓는 시점에서 나는 그 이유를 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지속적이며 일관되고 총체적인 사회변혁 운동이다. 조선 건국 후 진행된 조선인 만들기국민 대 개조과정”(함재봉 2017, 37)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전시대에 비해 훨씬 다각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세종은 고려의 좋은 사례는 말하지 말라고 하는 등 탈()고려 노선을 취하는 한편(세종실록 10/8/1, 15/6/15), 조선을 이상적인 유교국가로 만들어 가는 노력에 심혈을 기울였다.

 

태종은 신민들의 생활양식(modus vivendi)을 불교에서 탈피시키기 위해 주자가례를 적극 채택했다. 왕위에 오른 직후 태종은 주자가례를 인쇄해 신하들에게 나눠주었고(1403), 부왕 태조가 사망했을 때 창덕궁 동남쪽에 여막을 지어놓고 주자가례를 매일 읽는 모습을 보였다(1408). 성리학의 관혼상제(冠婚喪祭) 예법이야말로 새로운 조선인 만들기를 위한 혁신적 대안임을 강조하는 모습은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1428, 1432). 세종이 재위 14년인 1432년에 삼강행실도를 편찬해 백성들로 하여금 점차로 효제와 예의의 마당으로 들어가게만든 일 역시 총체적인 사회변혁 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고려인으로 표현되는 구체제 사람들을 포용하고 명예를 존중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국가를 가진 자라면 절의 있는 선비를 포창해 만세의 강상을 굳게해야 한다는 권근(權近)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몽주와 길재를 복권시켰다(1401). 고려 관리였던 서견(徐甄)백이(伯夷)의 도를 말하면서 고려의 왕업이 길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시 쓴 것으로 탄핵 되었을 때, 태종이 만일 이씨의 신하에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름다운 일이라면서 그 죄를 묻지 말라고 지시한 일도 같은 취지였다(태종실록 12/5/17).

 

태종은 태조와 정종 시기를 거치면서 구체제 청산은 끝났다고 보고 고려인들을 적극 포용했다. 호패법을 막 시작하던 1413년 고려 후손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가 충청도 공주에 숨어 살다가 체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왕거을오미는 성과 이름을 고쳐 사용하던 중 호패를 마련하려다가 정체가 드러나 체포되었는데, 그를 죽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언관들에게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역대 제왕이 역성 혁명하여 전대 자손을 베어 없앤 사실을 나는 역사책에서 보지 못했다.” 결국 왕씨의 후예를 보전하겠다는 왕의 의지에 따라 왕거을오미는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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