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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참척 겪어낸 큰선비 김인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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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방활력연대 작성일 22-08-22 09:57 조회 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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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자 키에 두어 치 관 두께라니. 북망산 바라보니 눈이 늘 젖도다. 가련할 손 사람의 일, 슬퍼한들 무엇하랴. 야속한 하늘의 뜻, 믿기조차 어렵네. ‘동야의 울음소리’(당나라 시인 맹교가 세 아이를 연달아 잃은 일) 목메어 차마 못 듣겠네. ‘퇴지의 제상 차림’(시인 한유는 딸을 잃었음) 헛되고 처량해라. 책상머리 저 서책은 평일의 흔적일래, (내 아들아) 그림자라도 부질없는 꿈길에 나타나주렴.

 

-하서집 2659

 

아들과 딸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누가 알 것인가. 그 슬픔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자식 잃은 사람, 그 슬픔 어이 견디리. 내 일찍 겪은 일 있어 아노라. 눈물이 손수건을 적시네.”(하서집 170) 뒷날 김인후는 친구가 자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전근대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유아의 사망률이 높았다. 몽테뉴(1533~1592)도 두세 명의 자녀를 잃었다고 한다. 그때는 산모의 치사율도 높았다. 16~17세기 프랑스에선 산모 1000명 가운데 40명쯤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할 정도였다. 김인후에게도 이런 액운이 닥쳤다. 그의 둘째딸이 첫아이를 낳고 탈이 생겼다.

 

의원은 용렬하고 무당은 요망하여”(하서집 3111), 그는 딸도 외손자도 모두 잃었다며 탄식했다. 조선시대엔 약을 써도 효과가 없으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들 무당의 단골이었다.

 

김인후는 둘째딸의 때 이른 죽음을 서러워하며 태어나자마자 (네가) 이미 착한 줄 알았고, 또 곧은 성품임을 알았다며 슬퍼했다. 잃어버린 외손자에 대해서도 “() 울음소리 우렁차서 문밖까지 들렸는데”(하서집 3111)라며 한숨을 쉬었다.

 

근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엔 연령과 성별의 구분 없이 어디에나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그리하여 김인후와 같이 자애로운 가장의 눈가엔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딸들 교육에도 열성

 

김인후의 딸 사랑은 사위에 대한 무한 사랑으로 번져간 것일까. 그는 둘째사위 양자징을 유난히 아꼈다. 양자징의 부친인 소쇄옹 양언진은 김인후의 막역한 벗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세교(世交, 대대로 맺은 교분)’가 있는 집안이었다. 그 시절엔 자녀의 결혼에서 그런 집안을 선호했다. 김인후는 셋째딸도 지기(知己)인 미암 유희춘의 며느리로 보냈다.

 

인생엔 예기치 못한 풍파가 있는 법이고,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김인후의 둘째딸이 첫아이를 낳고 곧 세상을 떠난 뒤 셋째딸에게도 액운이 닥쳐 시아버지 유희춘의 귀양살이가 10년 넘게 이어지는 비운을 맞았다.

 

김인후는 사랑하는 셋째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곤 했다. “내 친구(유희춘) 북방에 갇혀 있구나. 네 지아비(유경렴)는 만리 길 멀다 않고 따라갔다 하니. 가을바람 으슬으슬 끝없는 () 걱정, 들국화 술잔에 어리어 비치누나.”(하서집 1729)

 

유희춘은 을사사화에 연루돼 함경도 종성에 유배됐다. 그 아들로 김인후의 사위 유경렴은 부친을 시봉하러 그곳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시가에 남아 홀로 애를 태우고 있을 셋째딸을 걱정하며 아버지는 눈물지었다.

 

김인후의 딸들은 한시를 짓고 한문 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내 윤씨 역시 한문에 밝았다. 안사돈 송덕봉은 명사(名士)이기도 했다. 그들 집안의 교육열은 여성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 시대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양반 가문에선 딸에겐 한글을 가르쳐 정성이 담긴 안부 편지를 쓸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만족하는 게 보통이었다.

 

또 하나, 우리가 잘 모르는 관행이 있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신혼인 딸과 사위가 친정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7세기가 되면 부계 위주의 종법이 뿌리를 내려 아들과 며느리가 부모를 받들며 사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16세기 인물 김인후의 경우도 그러했다. 신혼이던 둘째딸과 그 배우자 양자징이 한동안 김인후 내외를 시봉했다. “(둘째딸) 내외는 병든 나를 참으로 정성껏 보살폈소”(하서집 1727)라고 말할 정도였다.

 

1548년부터 1550년까지 김인후 내외는 순창에 머물렀다. 그들은 큰아들 김종룡 내외에게 본가인 장성의 대맥동을 지키게 했다. 그러고는 싹싹한 둘째딸 내외를 데리고 갔다. 둘째아들 김종호는 당시 미혼이었다. 나중에 김인후 내외가 장성 본가로 돌아온 뒤 김종호는 순창 적성면으로 장가들었다. 김종호도 상당 기간 처가에서 지냈다. “부디 가서 실가(곧 아내) 잘 돌봐주고, 배움에 힘써 무지를 다스리게.”(하서집 1405) 김인후는 처가로 가는 둘째아들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했다.

 

큰사위 위해 청탁 편지

 

 

김인후 선생의 절의와 학문을 숭앙하기 위해 그의 문인들이 1590(선조 23) 장성군 황룡면에 세운 필암서원.

 

제자이자 가장 신뢰하는 친구의 아들인 양자징. 순창 시절 곁에서 시봉한 둘째사위를 향한 김인후의 사랑은 끝이 없었다. 훗날 양자징은 장인과의 기억을 추억하며 이렇게 썼다.

 

이것은 스승이신 하서 김 부자(부자는 큰스승, 곧 김인후)께서 소자에게 주신 것이다, 평생 그 은혜에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사모하는 마음 가눌 길 없어 (이 벼루를) 보배처럼 간직해왔노라. 어느 날, 일재 (이항) 선생이 벼루를 보시고 부러움에 젖어 말씀하셨다, ‘이 벼루는 벼루가 아니라, 바로 발우(불가의 공양그릇,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거니, 그대는 명심하시게.

 

김인후가 양자징에게 선물로 준 벼루는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양자징도 잘 알았다. “이 벼룻돌은 (중국) 단주 영양의 명품이라, 부드럽되 먹이 흐르지 않는다, 매끄러워 먹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하서집 3700) 장인이자 스승으로부터 그 벼루를 물려받은 양자징은 평생 학문에 힘써 마침내 필암서원에 배향됐다(1786).

 

김인후가 둘째사위를 아꼈다고 해서 큰사위 조희문을 박대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큰딸 내외도 끔찍이 사랑했다. “산 늙은이(곧 김인후) 잠깨어 일어나네. 창포 앞에 세수한다네. 동상(사위 조희문)의 웃음소리 기쁘게 들려오네. 잠깐 사이에 내 번뇌와 병, 한꺼번에 물러간다오.”(하서집 2187) 조희문에 대한 사랑 또한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조희문은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다. 그의 벼슬길을 열기 위해 김인후는 고관이 된 옛 친구에게 청탁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때 김인후는 인종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조정의 거듭된 기용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도양양한 사위 조희문을 위해선 어려운 부탁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늘 위 그대(김인후의 벗) 살고, 나는 만산 가운데 누워있다네. () 시골 살림은 마을마다 해마다 곤궁하기 그지없다오. () 평생 두고 먹을 약을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조자(사위 조희문)로 말미암아 그게 될는지요.

 

-하서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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