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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참척 겪어낸 큰선비 김인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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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방활력연대 작성일 22-08-22 09:55 조회 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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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척(慘慽) 겪어낸 큰선비 김인후

 

 

퇴계 이황과 더불어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김인후. 그는 지조 있는 충신이자 호남 의병을 키운 주역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누구보다 인정 많고 관대한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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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 정조가 하사한 내탕금으로 1802년 출간된 하서 의 문집에 실린 초상 을 판각한 것이다.

 

아마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그러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16세기의 큰선비였다. 다섯 살에 천자문을 익혔고, 여섯 살에 한시(漢詩)를 능숙하게 지었다. 소년 시절부터 문명(文名)을 떨쳤고, 성리학 외에 천문, 지리, 의학, 점서(占筮), 산수, 율력(律曆)에도 조예가 깊었다. 서예에도 능통해 해서와 초서를 다 잘 썼다.

 

그가 남긴 1600편 가량의 한시는 당송(唐宋)의 문장가와 견줄 만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후대의 선비들은 김인후의 학문과 문장뿐 아니라 절의(節義)와 도덕 또한 흠모했다.

 

현종은 어필(御筆)로 직접 현판을 써, 김인후를 제향하던 필암서원’(전남 장성군 소재) 편액(扁額)을 내렸다. 김인후의 됨됨이를 가장 높이 평가한 이는 정조였다. 김인후를 문묘(文廟)에 배향해 동국 18의 한 사람이 되게 했을 뿐 아니라, 그의 문집인 하서집(河西集)을 증보 편찬하기 위해 내탕금(內帑金, 조선시대에 내탕고에 넣어두고 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을 하사했다.

 

김인후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16세기 조선의 성리학계를 이끌었다는 게 당대의 평가다. 그 무렵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된 천명도(天命圖)에 관해서도 탁견을 제시했다. 천인(天人) 관계를 도해한 천명도는 정지운(鄭之雲)이 그린 것인데, 김인후가 이를 대폭 보완 수정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쳤다. 이황도 그 논의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의 심오한 토론은 뒷날 사칠논변(四七論辯, 사단과 칠정에 관한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다.

 

그 스승에 그 제자들

김인후는 지조가 높기로도 유명했다. 문과에 합격해 중종의 조정에 나아가기 무섭게, 그는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의 복권을 발의했다. 당시엔 그런 논의를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그러나 김인후는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사림의 무죄를 주장해 한 시대의 도덕과 정론을 바로 세웠다.

 

김인후의 절조는 인종과의 관계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젊은 시절 그는 동궁(훗날의 인종)의 사부로 임명돼 신망이 두터웠다. 동궁은 그의 학문과 충성심에 감동해 주자(朱子)성리대전을 하사했고, 친히 대나무 그림까지 그려줬다.

 

동궁은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곧 승하했다. 복잡한 궁중 사정이 젊은 왕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런 연유로 김인후는 벼슬에서 물러났고, 그후 인종을 추모하며 그의 신하로서 의리를 다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해마다 인종의 기일(忌日)이 되면 고향의 조용한 숲 속에 들어가 온종일 목 놓아 통곡했다. 명종은 여러 차례 벼슬을 주며 그를 조정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는 인종의 충신이었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의 문하에서 수업한 김천일과 고경명 등은 나라를 위해 떨쳐 일어섰다. 이른바 호남 의병의 대다수는 김인후가 초야에서 기른 선비들이었다. 세상은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이라며 그들을 칭송했다.

 

비참하기 그지없어라

 

사람들은 이렇듯 강직한 김인후가 집에서도 엄격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을 것이라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누구보다 인정 많고 관대한 아버지였다. 이따금 아내와 술잔을 건네며 시를 교환하는 다정다감한 남편이기도 했다.

 

김인후는 윤씨 부인에게서 34녀를 얻었다. 아들로는 장남 김종룡과 차남 김종호(찰방), 그리고 요절한 셋째아들이 있었다. 네 딸 중에서 셋은 장성해 각기 조희문(부사), 양자징(현감), 유경렴(찰방)과 결혼했다. 한데 막내딸은 15457, 열세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막내딸이 요절하자 김인후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만사 하릴없다, 관 뚜껑 덮고 누워 괴로워했네. 병의 뿌리 깊었던가, 여러 해 동안 약을 구하기 어려웠네. 거센 바람 궂은비, 처음 염하던 그날, 처진 나물 찬 과일로 넋 보내는 상 차렸다네. 훨훨 타는 매운 불꽃, 집에 뻗쳐 놀랐다오. 이후로 이내 몸엔 온갖 병 더하기만.”

 

막내딸이 세상 떠나던 날은 날씨도 궂었다. 어린 딸을 잃고 한없는 슬픔에 젖은 그는 딸의 무덤 앞에서 오열을 참지 못했다.

 

내 딸이여 내 딸이여, 마음과 몸 맑았도다.

 

심기조차 아름다웠어, 단아하고 성실했지.

 

갓 자란 난초, 티 없는 구슬

 

빈산에 널 묻다니,

 

봄이 와도 모르겠네.

 

죄 없는 너 보내놓고 () 이 지경이 되었구나.

 

백 년이 가도 원통치

 

내 억장이 무너지네.

 

어허라! 세 번 노래하니

 

노래도 구슬프네.

 

하늘 보고 목 놓아 우노마는

 

하늘은 묵묵부답이시네.

 

 

-하서집 1566~567

 

 

막내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유독 깊었다. 딸과 영결한 지 2~3년이 지난 뒤에도 슬픔은 줄지 않았다. 김인후는 탄식했다. “내 딸 세상 뜬 지 어느덧 삼 년, 해 넘겨 다시 오니 비참하기 그지없어라. 무덤가의 가벼운 바람, 얼굴을 스치네. 내 딸의 넋, 정녕코 바람 속에 엉겨 있으리.”(하서집 226~27)

 

 

눈물 마를 날 없어

 

 

그 일이 있기 전, 김인후는 막내아들도 병으로 잃었다. 그때도 여간 슬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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