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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장성 출신 한말 의병 기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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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방활력연대 작성일 22-05-27 09:39 조회 1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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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직접 처결 나선 기산도] 나라의 위태로움에 붓을 던지고 총을 들다

장성 출신식재 기재의 맏아들

이기·박인호 등과 자강회조직

을사5이근택 찔러 상해입혀

15년여 옥살이50세 장흥서 순국

1963건국공로포장수여

20220526() 광주일보

 

거병을 결정한 기산도가 박인호 등과 의논한 뒤 청년 30여 명 모아 일본군을 습격한 장성군 진원면 고산의 전경.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나는 조국을 구하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버렸노라. 나는 내 땅을 찾고자 세상사를 잊었노라. 나는 뒷일을 겨레에게 맡기노라. 나를 따라서 조국과 겨레를 지키라.”

 

나라의 위태로움에 붓을 던지고 총을 든 기산도는 일본 헌병의 추격을 받으며 총상으로 저는 다리를 이끌고 다니다가 외롭게 마지막 숨을 거둔 비운의 선비다. 18781016일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의 선비 식재 기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명석해 글 공부 진도가 빨라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이나 아우)에 해당하는 량연, 삼연 등보다 뛰어났다. 당숙인 기우만은 전라도에서 제일가는 선비였다. 5세에 어른들의 백양사 나들이에 함께 갔는데, 종조부 삼연이 부처님 가르침을 묻자 사람을 골고루 아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답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1894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당숙 기우만이 거병했는데, 산도의 아버지 기재도 가담했다. 16세의 산도는 동생 학도(당시 12)를 불러 조모, 어머니를 부탁한 뒤 참모로 참여했다. 이후 조정에서 내려운 파병 조칙에 해산한 뒤 분노의 나날을 보냈다. 산도는 이후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녹천 고광순의 딸과 혼인했다.

 

18964월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7월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산도는 서울을 오가며 젊은 지식층과 교류를 시작했다. 10월에는 이기, 박인호 등 당대의 의혈남아들과 자강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치중했다. 종조부 기삼연은 일제의 감시 속에 거병을 준비하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장성군 서삼면 축암리로 들어가 건달패와 어울렸는데, 산도가 찾아가 기삼연에게 거병을 촉구했다. 이후 산도는 박인호 등과 의논한 뒤 30여 명을 모아 장성군 진원면 고산에 올라가 거병의 뜻을 모았다.

 

모두 글 읽는 선비들로 구성된 산도의 의병은 당시 일본군 1개 소대가 광주와 장성을 오가며 일본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가 그 경계인 갈재에 매복, 7명의 일본군을 습격해 3~4명을 사살했다. 용의주도한 산도의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다 담양 방면에서 광주로 돌아가던 일본군과 조우하면서 전투를 하다 화력과 병력에 밀리면서 후퇴했다. 의병 3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기산도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장성 축암리 송계마을에 들어간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이나 아우) 기삼연을 찾아가 신속한 거병을 촉구했다. 사진은 거주민이 급감하면서 한산해진 지금의 송계마을.

본진으로 돌아온 산도는 일본군과 직접 맞서 싸우는 것이 중과부적이라고 판단, 을사오적을 암살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고 가산을 정리해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이범석, 서상규 등과 협의해 오적인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을 척결하기 위해 암살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권총, 단도 등 무기를 구입해 10여 명의 경비병이 호위하는 오적을 암살하는 계획을 세웠다. 190511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는데, 산도는 이틀 뒤인 1119일 일본 헌병에게 대신 암살 음모 혐의로 체포됐다. 황성신문은 산도를 애국청년으로 보도했는데, 산도는 다행히 1개월 만에 석방됐다. 그러나 요시찰인물로 감시 대상이 돼 행동에 제약이 컸다. 이범석은 190621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5명이 각각 1명씩 맡기로 했다. 산도는 군부대신 이근택을 맡아 변장하고 접근해 서울 종로 계동 이근택의 집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이근택은 자신을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칭하고 주한일본공사와 의형제를 맺는 등 악랄한 매국노였다. 산도는 이근택을 사정없이 찔렀지만, 비명을 듣고 찾아온 경비병들에게 붙잡혔다. 이근택은 중상을 입었지만 1개월간 치료를 받고 살아났으며, 이범석 등 다른 동지들도 모두 암살에 실패했다.

 

산도는 29세의 나이에 요인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서 10년을 살고 1916년 석방됐다. 감옥을 나왔으나 이미 조선은 일본에 강제병합돼 세상은 바뀐 뒤였다. 2명의 감시원이 따라붙었고, 고문으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된 산도는 강원도, 충청도 등을 전전하다가 고흥군 도화면 당도의 기하요라는 사람의 집에서 머슴으로 살았다. 밤에는 주변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글을 가르쳤다.

 

1919년 중국에 상해임시정부가 들어서자 몰래 자금을 모집해 송금했고, 10월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제자 박길용, 기동연 등을 데리고 평안도 진남포에 도착했다. 하지만 제자들의 만류, 일제의 감시 등으로 탈출에 실패한 뒤 고흥으로 돌아왔다. 19207월 일본 경찰은 한국독립군인으로 위장한 뒤 산도에게 모시러왔다고 속여 체포해 3일간 감금한 뒤 옷 속의 우국지사명단을 강탈했다.

 

산도는 광주로 이송돼 고문과 매질로 정강이가 썩어들어갈 정도였고, 다시 5년간 감옥에서  살다가 나왔다. 1925년에야 다시 세상에 나온 그는 몸과 정신이 피폐해져 쓸쓸히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후 1928년 12월 4일 장흥군 관산면 한 객창에서 50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장흥에 묻혀 있던 시신은 양자인 노식에 의해 고흥으로 옮겨졌다. 정부는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포장을 수여하고, 1967년 시신은 국립묘지 애국선열묘역에 안정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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