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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 문화자산도 꿰어야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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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방활력연대 작성일 22-10-06 17:20 조회 1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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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자산도 꿰어야 보배

2022.10.06. 매일신문 [청라언덕]

김도훈 문화체육부 차장

 

일제강점기 작사가이자 아동문학가로 활동한 고 윤복진(1907~1991)의 유족이 악보 등 소장하고 있던 자료 300여 점을 최근 대구시에 기증했다.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사업에 보태라는 뜻이었다.

 

대구에서 태어난 윤복진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기를 통틀어 윤석중과 함께 최고의 아동문학가로 평가받는다. 일제강점기 우리말로 된 시와 노래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잊지 않도록 하는 '소년문예운동'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그는 10대 후반이던 1925년 방정환의 추천으로 '어린이'를 통해 등단한 이후 윤석중서덕출신고송 등과 함께 동인 활동을 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박태준, 홍난파, 박태현, 정순철 등 당대 유명 작곡가들이 그가 쓴 가사에 곡을 붙였다. 박태준과는 4권의 동요집을 함께 냈던 사이다. 그러나 그는 6·25전쟁 중 월북했고, 1988년 해금되기까지는 일부 전문가를 제외하면 잘 모르는, 잊힌 존재가 됐다.

 

기증 자료 가운데 특히 1920년대 이름난 작사·작곡가들의 작품 35곡이 담긴 '동요곡보집'(1929)은 그동안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귀중한 자료다. 그밖에도 대다수 자료가 일제강점기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상을 담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상당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 직원들이 월북예술가 가족이란 멍에를 쓴 유족의 아픔에 공감하며, 오랜 기간 설득 끝에 얻은 성과란 점에 대해서도 박수를 보낼 만하다.

 

이처럼 대구엔 근대기 수많은 예술가의 흔적이 살아 숨 쉰다. 일제강점기 한국 문단의 주류를 이뤘던 이상화·현진건, 근대 서양음악의 기틀을 다진 박태준·현제명, 근대 미술의 토대를 닦은 이상정·서동진과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양식을 꽃피운 화가 이인성·이쾌대 등이 모두 대구 출신이다.

 

6·25전쟁이 터진 후엔 향촌동과 북성로 일대에 예술인들이 자리 잡으며 예향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향촌동은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가들의 요람 역할을 했다. 1951년 향촌동 골목에 문을 연 클래식 감상실 '르네상스'는 당시 외신기자들이 "전쟁의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흐른다"고 경탄했던 공간이다. 골목 끝에 구상 시인이 단골로 묵었던 화월여관이 있고, 그 앞 백록다방에서 화가 이중섭은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전쟁 때문에 암울했던 세상을 노래한 구상의 '초토의 시' 출판 기념회는 인근 '꽃자리다방'에서 열렸다. 그러나 대구시민 대다수는 이런 사실을 모르거나 잊고 산다.

 

지역에서 유일하게 대구에 출판산업단지가 들어선 배경도 흥미롭다. 6·25전쟁으로 서울의 수많은 인쇄업체가 대구로 내려와 자리 잡은 게 남산동 인쇄골목이다. 당시 대구엔 육군본부가 있었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문화 예술인들이 결성한 '문총구국대'가 활동하는 등 인쇄 수요가 많았다. 이후 한창 호황일 때 남산동 인쇄골목은 인쇄 메카인 서울 을지로에 버금갈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성서 출판산업단지는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 산업단지 대부분은 인쇄출판과 관련이 없는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대구의 현실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대구엔 문화의 구슬은 넘쳐나지만, 그것을 꿰는 정책은 빈약한 듯하다. 산재한 문화자산을 보배로 만들 수 있는 고민과 노력이 절실하다. 문화자산도 꿰어야 보배다.

 

김도훈 기자 ho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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