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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흔적의 역사(최부의 표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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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방활력연대 작성일 21-04-06 17:14 조회 2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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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표해록을 쓴 나주 출신 최부

2021.4.6. 경향신문

 

 황제의 알현 때도 상복을 고집한 조선관리 최부

 

표류의 역사를 말할 때 흔히 네덜란드인인 박연(얀 야너스 벨테브레이·1595~미상)과 헨드릭 하멜(1630~1692)를 떠올리며, ‘표류기하면 하멜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3면이 바다인 지리적인 여건 아래 조선인의 표류도 자주 일어났다. 연중 대륙에서 동쪽으로 부는 계절풍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대부분은 일본 연안으로 표류했다. 그러나 중국이나 류큐(琉球·현 오키나와·沖繩), 멀리 홋카이도(北海道)나 여송(필리핀), 안남(베트남)까지 표류하는 조선인도 생겼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이가 최부(1454~1504)이다.

 

홍문관 교리였던 최부는 1487(성종 18) 제주 등 3읍의 추쇄경차관(달아난 노비 등을 찾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관리)으로 임명돼 제주로 건너간다.

 

그러나 이듬해 초 부친상의 기별을 받고 고향(나주)로 급히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난다. 최부를 포함한 43명이 탄 배는 14일간이나 표류하며 해적을 만나는 등 고초를 겪다가 겨우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에 표착했다. 한때 왜구로 오인받아 몰살 당할 뻔했지만 의연한 언행으로 자신이 조선의 관원이라는 사실을 납득시켰다. 마침내 최부 일행은 항주에서 운하를 통해 북경-요동을 지나 표류 6개월만에 귀국한다. 최부는 성종의 지시에 따라 8일만에 표류 보고서를 올렸는데, 그것이 최부의 <표해록>이다.

 

표류기에 따르면 최부는 해적과 만났을 때나 황제를 알현할 때, 조선 사대부의 체통을 버리지 않았다. 해적들이 최부의 옷을 벗겨 거꾸로 묶고 무수히 구타했지만 몸이 문드러지고 뼈가 가루가 될지언정 금은이 나오겠느냐고 버텼다. 해적들은 남은 양식과 의복을 빼앗은 뒤 닻과 노를 바다에 던지고 달아났다.

 

황제의 알현 때 상복을 벗지않겠다고 고집 피운 일화가 눈에 띈다. 즉 베이징에서 명나라 황제(홍치제·재위 1487~1405)의 하사품(의복)을 받은 최부는 황제를 알현하여 감사의 예를 올려야 했다.

 

명나라 예조는 황제 앞에서는 당연히 상복을 벗고 길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최부는 부친상 중이므로 절대 상복은 벗을 수 없다고 버텼고, 급기야 명나라 예부 소속 홍려시 주부(이상)의 집에까지 찾아가 제발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상은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을 잡아 꺼내는 것이 법도 아니냐면서 아무리 상중이라지만 황제 알현 때는 길복을 입어야 한다고 일축했다. 이상은 끝끝내 상복을 입고 대궐문 앞에 나타난 최부의 상관(喪冠·상중에 쓰는 마로 만든 관)을 벗기고 사모를 씌우며 혀를 찼다.

 

아니 황제를 알현할 때만 잠깐 길복으로 갈아입고 나와서 다시 상복으로 바꿔 입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습니까.”

 

최부는 할 수 없이 길복으로 갈아입고 황제를 알현한 뒤 다시 상복으로 바꿔 입었다.

 

조선의 역사에 대한 최부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중국 관원이 고구려는 무슨 장기(長技)가 있어서 수당(隋唐)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느냐고 묻자 최부의 답변은 명쾌했다.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 있는 장수가 있었고 병졸은 모두가 윗사람을 위해 죽었소. 그런 까닭에 고구려는 100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오.”

 

어느날 요동 사람들의 인사를 받은 최부는 요동은 곧 옛 고구려의 도읍이었다면서 고구려가 지금 조선이니 땅의 연혁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실상은 한나라와 같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조선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뜻이었다.

  

하멜 못지않은 표류기 남긴 최부

 

최부의 <표해록>은 조선시대 누구도 가보지 못한 강남(강소성·절강성) 지방과 산동성, 그리고 요동까지 중국을 종단하고 돌아와 쓴 값진 기행문이다.

 

명나라 건국(1368)과 함께 실시된 해금(海禁)정책으로 감히 그 지역을 여행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송환도중 만난 중국인은 조선에서 견문이 넓은 자라 해도 그대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성절사로 중국을 방문한 채수(1449~1515)는 최부에게 장강(양자강) 이남을 본 조선인이 근자에 없었는데 그대만이 두루 관람했으니 어찌 행운이 아니겠냐고 부러워했다.

 

20여년 뒤인 1511(중종 6) 314일 참찬관 이세진은 최부의 <표해록>은 금릉(지금의 남경)에서 북경까지 산천·풍속·습속을 다 갖춰 기록했으니 조선사람들이 비록 중국을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이것으로 하여 알 수 있다면서 책의 출판을 촉구했다. 최부의 <표해록>은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여러 판본과 사본이 통용됐으며, <당토행정기>(1769)라는 이름의 일본어 번역본까지 나왔다.

 

그렇게 견문을 넓힌 최부가 돌아왔다면 마땅히 중히 발탁해서 활용했어야 했다. 최부는 귀국하자마자 성종임금의 명에 따라 8일만에 <표해록>을 써서 제출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됐다. 조정신료들은 아무리 왕명을 받았다지만 부친상중에 뭐하는 짓이냐고 탄핵했다. 성종이 내가 시킨 것이라도 두둔했지만 신료들은 부친상을 다 치르고 (표류기를) 썼어도 늦지 않을 것인데 여러 날 서울에 머물렀다고 비판했다.

 

겨우 성종의 비호로 대제학의 길목이라는 예문관 응교에 발탁됐다. 하지만 연산군(재위 1494~1506)의 등극 이후 벌어진 두차례 사화(무오·갑자사화)에 휘말려 결국 참형을 당한다.(1504)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1431~1492)의 문인이라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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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7~88년 제주도 파견 관리인 최부는 부친상의 기별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했다. 최부는 15세기에 중국 대륙을 종단한 유일무이한 조선관리가 됐다.|최부의 <표해록>, 서인범·주성지 옮김, 한길사, 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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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을 남긴 최부의 필적. 최부는 해적을 만나도, 왜구로 오인받았어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고, 황제를 알현했을 때도 상복을 벗지않겠다고 고집하는 등 유교이치에 맞지않은 언행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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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각국에서 출간된 최부의 <표해록>. 위 왼쪽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1979년 최부의 방손인 최기홍이 번역한 <표해록>, 1769년 일본의 주자학자 기요다 군킨(靑田錦君)<당토행정기>라는 제명으로 번역한 책, 1992년 베이징대(북경대) 거전지에(葛振家) 교수의 <표해록-중국행기> 점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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