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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임영진 교수(4) - 왕인 박사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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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방활력연대 작성일 20-12-31 12:34 조회 2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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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박사는 마한 - 왜 교류의 상징적 인물
왕인박사는 왜, 왜(倭)로 갔을까?
2020년 11월 25일(수) 


지난 글 <21>에서는 백제가 왜에 전했다고 인식해 왔던 신문물 가운데 마한이 전하였던 것이 적지 않았음을 보았는데 왕인박사 문제는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백제에서 파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에 논란이 되어 왔는데 백제와 마한의 관계를 이해하면 쉽게 풀 수 있다.


◇왕인박사 관련 기록

일본 최고의 사서인 ‘고사기’(712년)와 ‘일본서기’(720년)에는 왕인이 응신천황(應神天皇) 16년(405)에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전해주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국내 사서에서는 왕인을 찾아볼 수 없고 17세기 이후의 개인 문집에서 찾아질 뿐이다.

1655년 을미통신사 종사관이었던 남용익은 귀국후 견문록인 ‘부상록’을 남겼는데 응신왕 갑진년에 백제가 경전과 여러 박사를 보냈고 을사년에 왕인을 보냈다는 것을 기록하였다. 1719년 신유한의 ‘해유록’과 1763년 원중거의 ‘화국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이덕무의 ‘청령국지’, 한치윤의 ‘해동역사’, 김정희의 ‘완당집’ 등에 왕인이 소개되어 있다. 20세기초 이병연의 ‘조선환여승람’ 영암군편에는 왕인이 백제 고이왕때 성기동에서 태어났고 일본 응신천황때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였으며 그의 무덤은 오사카 히라가타(枚方)에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왕인박사에 대한 논란

왕인은 일본 고대 사서에 명기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와 같은 국내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영암 월출산 자락의 구림마을에 왕인의 설화와 지명이 전해오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내선일체를 강조하기 위해 통일신라 도선국사 설화를 바탕으로 조작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는 475년까지 서울이 도읍이었는데 369년 전남지역을 병합하였다고 보았던 기존 통설에서는 405년에 영암과 같은 시골에서 큰 학자가 나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있다고 하더라도 왜로 파견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천자문도 6세기 양나라 주흥사가 만들었기 때문에 5세기초에 왕인이 전해줄 수 없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왕인박사는 어디 출신일까

현재 왕인 문제에 접근해 볼 수 있는 자료는 설화와 지명이 있다. 설화와 지명은 문헌기록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화석과 같이 존재 사실을 확인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것이 조작된 것이라고 본다면 그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내선일체를 표방하였던 일제강점기에 왕인을 상징적 인물로 내세우기 위해 조작하였다면 백제 도읍지인 서울이나 공주, 부여에서 하는 것이 순리였을 것이다. 굳이 멀리 떨어진 영암지역에서 조작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이 일어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암 성기동에 전해오는 설화와 지명이 도선국사와도 관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강점기에 왕인과 관련된 것으로 조작되었다는 것은 막연한 추정일 뿐이다. 설화와 지명은 그 주인공이나 사건이 중첩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오히려 먼저 있었던 설화와 지명에 후대의 설화와 지명이 덧씌워지면서 후대의 것이 더 큰 인지도를 얻기도 한다.

왕인과 도선이 중첩된 영암 성기동의 설화와 지명은 고고학 유적에서 시기가 다른 문화층이 상하로 중첩된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왕인층과 도선층을 나누어 보아야 할 것이다.

405년 당시 이 지역은 백제 영역이 아니라 마지막 마한 소국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3세기 중엽경 백제 건국 이후부터 일본열도로 이주한 마한 세력들은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지역의 마한 세력과 교류하였다.

특히 전남지역은 530년경까지 마지막 마한 사회가 발전하였기 때문에 가장 오랫동안 교류하였다. 이 지역에서 다양한 신문물들이 일본열도로 전해지는 가운데 영암 월출산 자락 성기동의 왕인에 의해 천자문과 논어도 전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왕인박사가 전한 천자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자문은 6세기 중국 양나라 주흥사(周興嗣)가 만든 것이다. 따라서 5세기초 왕인박사가 천자문을 일본에 전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3세기 위나라 종요(鍾繇)가 만든 천자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진나라 통일 이전부터 각지에서 한자 교육을 위해 여러 교재들이 만들어지고 보완되어 나갔다. 지금은 양나라 주흥사가 만든 천자문이 널리 통용되지만 그 전에 여러 가지 교재가 있었고 그 뒤에도 새로운 교재가 만들어졌다. 국내에도 최병손의 ‘천백자문’이나 정약용의 ‘이천자문’ 등이 있다.


◇왜는 왜 왕인박사를 모셔갔을까

왕인의 출생지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가 있다. 왜에서 왕인박사를 모시고 가서 논어와 천자문을 가르치도록 한 것은 학문적인 교화를 통해 문화적으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지만 시기적으로 왜가 중국 남조와 교류하려던 때였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송서’ 왜국전에는 5세기대 다섯 왕이 여러차례 사신을 보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왜가 백제의 도움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왜가 백제를 포함하여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七國諸軍事(7국제군사)를 요청하였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백제의 도움을 받아 갔다면 그와같은 요청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왜는 백제 몰래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독자적으로 외교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학자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왕인이 도일하였던 5세기초는 영산강유역에서 40m 내외 규모의 거대한 고분들이 축조되고 일본열도와 활발하게 교류하던 시기였다. 3세기 중엽 이후부터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던 마한계 왜인들은 주로 전남지역에 남아있는 마한 세력과 교류하였으므로 그때 왕인을 모셔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왕인박사는 역사적으로 일본을 빛낸 105인 가운데 1인이자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에 일본 사서에 명기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국내에서는 크게 기여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사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광종때(958년) 과거제도를 시작하게 만든 쌍기는 중국 산동 등주에서 고려에 귀화한 사람이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현재의 행정고시를 비롯한 국가고시의 기원이 되어 지금까지 우수한 인재를 공개적으로 선발하게 한 중요한 제도였다.

이와같은 쌍기의 역할이 우리 교과서에 소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특별히 중국에 기여한 바 없었으니 중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왕인은 쌍기보다 500년 이상 앞선 인물인 만큼 영암 월출산 자락에 설화와 지명이 남아있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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