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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임영진 교수(3) - 마한의 사회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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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방활력연대 작성일 20-12-31 12:30 조회 2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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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사회 성격
마한은 통합된 국가 아닌 54개 소국이 공존한 사회였다
2020년 12월 02일(수) 



지금까지 22편의 글을 통해 마한의 출범과 소멸, 의·식·주, 대외 관계 등 다양한 면모들을 살펴보았다. 기원전 3세기초 고조선인의 디아스포라에 따라 충남 아산만 지역에서 출범하였던 마한은 54개 소국으로 발전하다가 3세기말부터 백제에 병합되기 시작하여 530년경 광주·전남지역을 마지막으로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마한은 시간적으로 800여년간, 공간적으로 경기·충청·전라지역에 걸쳐 발전하였는데 시간, 공간, 사회 특성에 따라 5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지만 마한은 마지막까지 통합된 국가를 형성하였던 것이 아니라 가야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가 공존하였으므로 마한 제국(諸國) 혹은 마한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시기별 마한 사회의 변화

성립기(기원전3세기~기원전 1세기)는 아산만권을 중심으로 지석묘로 대표되는 비파형동검문화 대신 적석목관묘와 관련된 세형동검문화가 등장하여 확산되는 시기이다. 이 새로운 청동기문화는 사슴, 손, 십자일광문, 수렵문 등이 새겨진 의례용 청동기가 특징이며, 그 주인공은 샤마니즘과 관련된 종교주재자이자 농경과 수렵을 관장하는 제정일치 사회의 지도자로 추정된다.

초기(기원후 1세기~ 3세기 전반)는 철검, 복골, 동전 등이 나타나며 내륙지역에서는 목관묘와 옹관묘가, 황해지역에서는 분구묘가 축조되었다. 동물 어깨뼈를 이용한 복골은 기존의 제정일치사회가 신권정치사회로 바뀌었음을 의미하고, 화천ㆍ오수전 등의 중국 동전은 낙랑을 비롯한 중국과의 교류를 반영한다.

중기(3세기 후반~4세기 중엽)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빠른 발전이 이루어지지만 그 주체는 고구려계 유이민이 건국한 백제였다. 백제에 병합된 전북지역까지는 기존 마한 문화가 크게 위축되었지만 광주·전남지역 마한 사회는 대규모 옹관이 사용되고 분구묘가 대형화되는 등 더욱 발전하였다.

후기(4세기 후엽~5세기 후엽)는 광주·전남지역 마지막 마한 사회가 본격적으로 발전해 나갔던 시기이다. 분구묘는 수평적인 확장과 수직적인 확장을 통해 가족 집단묘로 발전하였다.

나주 반남지역 고분은 고대국가 도읍지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위용을 과시하였고 금동관, 금동상투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 최상급 위세품이 부장되었다. 남해안 지역에서는 연안항로에 해당하는 지리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해상 세력이 성장하는 한편 여수, 순천, 광양 등 동부지역은 대가야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소멸기(5세기 말~6세기 초)는 광주·전남지역 마지막 마한 사회가 최성기를 맞았다가 해체되는 시기이다. 나주 다시지역에서는 신흥 세력이 대두하였는데 이는 기존 반남세력을 억제하려는 백제의 남진 정책에 의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일본식 장고분이 축조되기도 하였는데 그 주인공은 일본 규슈에서 마지막 마한 사회와 교류하다가 일본 국가성립 과정의 정세변화 속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이다. 광주·전남지역 마지막 마한 사회는 규슈 지역의 우호 세력을 잃음과 동시에 정치적 안정기를 맞은 백제 성왕의 적극적인 남진 정책으로 인하여 530년경 백제에 흡수되었다. 백제가 538년 부여로 천도하고 지방조직을 22담로에서 37군으로 개편한 것은 이와같은 영역 확장에 따른 것이다.

◇여러 소국의 공존과 균형

경기·충청·전라지역에 걸쳐 54개 소국이 공존하였던 마한 사회는 경기지역부터 하나하나 백제에 병합되어 나갔고, 광주·전남지역을 중심으로 남아 있었던 15개 마한 소국 역시 통합된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530년경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마한 제국이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였던 이유는 복합적이겠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철기가 발전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마한 사회는 농경을 토대로 발전하였지만 부드러운 경작지에서는 철제 농구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철기 제작과 직결된 지배 세력의 성장이 두드러지지 못하였다.

이와같은 환경 속에서 마한 제국은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거나 군사력을 키울 필요가 없었다. 중앙집권적인 통합 사회를 추구하였던 고대 국가들과 달리 마한 제국은 각 소국들이 독자성을 잃지 않고 자급자족하였기 때문에 통합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농경 중심의 공동체 사회

54개에 달하는 마한 소국들이 3세기대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양하지만 농업의 발전이 가장 중요하였다. 특히 마지막 마한 사회가 발전하였던 5세기대는 매우 온화한 환경으로 인해 농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영산강은 강이라기보다는 내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넓고 깊어서 상류지역까지 항해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육로보다 편리한 교류 통로가 되었다.

이와같은 환경 속에서 광주·전남지역 마지막 마한 사회는 농경을 기반으로 혈연공동체 사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는 지상 매장, 주구 시설, 전용 옹관, 추가장에 의한 다장, 수직적·수평적 분구 확장, 수묘 축조 등의 특징을 보여주는 분구묘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권역별 연맹체 사회

마한 사회는 혈연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하였지만 이는 통합된 고대국가로의 발전을 가로 막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권역별로 중심 소국들이 있어 중국과의 교류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강유역권의 백제국(伯濟國), 아산만권의 목지국(目支國), 금강유역권의 건마국(乾馬國) 등이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광주·전남지역 15개 마한 소국들은 영산강내해권, 서해안권, 남해안권으로 구분되면서 각각 주도적인 소국들이 있었다. 6세기초 중국 ‘양직공도’에 기록된 지미(止迷), 마련(麻連), 하침라(下枕羅)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지미국은 3세기 중후엽의 사정을 반영하는 ‘진서 장화전’의 신미국(新彌國)에 해당한다.

5~6세기대의 지미국은 금동관을 쓴 왕이 다스렸으며 백제를 비롯한 가야, 신라, 남조, 왜와 교류하였다. 아직까지 지미국 왕이 성곽에서 거주하였던 증거를 찾지 못하였는데 이는 다른 마한 제국이나 백제와 정치적, 군사적 긴장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한 제국은 각 나라마다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면서 평화적으로 공존하였던 것이다. 당시 가야 제국은 대가야가 대표적이었지만 마한 제국과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가 공존하고 있었다.

광주·전남지역 마지막 마한 제국은 530년경 백제에 흡수되었고, 가야 제국을 대표하였던 금관가야는 532년,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에 통합되었으므로 마한과 가야의 소멸 시기는 큰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삼국시대는 그 이후의 100년 정도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는 1145년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 일행의 인식이었지만 이제는 마한 제국과 가야 제국을 포함하는 새로운 시대 명칭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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