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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역사는 신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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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방활력연대 작성일 21-08-01 14:10 조회 4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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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호 (공연전시기획학과) 2020-10-26

동신대 홈페이지

 

한국 근대 사학의 문을 연 단재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선택·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80여 년 전,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말했다. 일제는 한국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식민통치가 용이하도록 조작된 식민사관을 유포하였다. 한민족의 독자적 발전과 주체성을 부정하고 타율성을 강조한 일선동조론’, ‘정체성론’, ‘타율성론이 그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한국의 근대 역사학을 연 것이 단재의 조선상고사였다. 단재의 역사관은 한국사의 웅혼한 모습을 강조하였다. 단재는 한국사의 무대를 중국 동북 지역과 랴오시 지역까지 넓혔고, 단군시대에는 산둥 지역을 경영했다고 하였다.

단재의 역사관은 스스로 강조한 실증성에 한계가 뚜렷하고 과도한 민족의식이라는 문제점은 있었지만,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사학을 시도하였고, 열악한 연구 환경에도 불구하고 근대 역사학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지역사 연구의 거품과 환상 

하지만 단재의 시대적 한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역사 서술에 기대어 대륙강토를 주장하거나, 환단고기와 같은 출처가 불명확한 자료에 기대어 고대사의 활동 영역을 무분별하게 확장하는 등 공상적 역사가 주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단층적 역사관은 비단 대륙강토공상적 역사에 머물지 않는다. 지역사 연구가 본격화된 90년대 이후, 지역사에 대한 일반인의 탐구력과 이해도, 그리고 다큐멘터리 등 각종 매체의 기획력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였다. 한편으로는 지역사의 절편화가 심화되면서 해당 지역이 다른 지역과 분리되어 고립되거나 특수화되어 버리는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가야사 연구나 마한사 연구는 지역 문화를 통한 정체성 찾기라는 명분을 충족시키는 이상적인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정체성 찾기는 지역사를 절편화하고 나아가 역사적 객관성을 벗어난 거품을 만들고 있다.

 

마한과 백제, 그리고 옹관묘의 실체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한은 기원전에 한강유역, 금강유역, 그리고 영산강유역까지 한반도 서부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여러 소국들을 아울러 지칭한다. 그리고 백제가 성장함에 따라 마한의 소국들은 차례로 편입되었다.

전남 지역은 20세기 초부터 옹관묘라고 하는 항아리를 무덤으로 사용하는 토착 문화상이 드러나 그 실체에 대한 논쟁이 있다. 이 무덤이 수장의 무덤이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독자적인 정치세력이었다는 견해는 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당대 고구려 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강성했던 백제 근초고왕의 위상, 백제와 왜국이 통교하던 바닷길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지정학적 조건, 그리고 당시 지역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역사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전남지역에는 마한의 범주에 속한 다수의 소국이 있었음에는 이견이 없다. 그리고 백제가 성장하자 그 영향력 아래 들어갔던 사회였기도 하다. ‘침미다례(침명현=해남)’를 백제가 공격해 정복하고 연이어 여러 소국이 항복했던 4세기의 일이다. 이 기사가 비록 일본서기의 내용이지만, ‘남만(남쪽 오랑캐)’이라는 백제의 천하관에서만 나올 수 있는 표현이 있기 때문에 사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역사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그렇다면 이후에도 존속하던 전남지역 고분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백제의 지방 지배체제가 확립된 것은 훨씬 후대인 6세기 후반 무령왕을 전후한 시기였다. ‘담로라는 지방관을 본격적으로 파견한 시기였다. 이러한 지배체제가 확립되기 전에는 각 지역의 수장이 전통적인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마치 위임통치와 같은 방식이었다. 그러한 사례는 백제 양식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부장한 충남 공주지역 수장들의 고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전남지역 고분에서도 백제 양식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부장되어 있기 때문에 백제의 위임통치자’, 즉 백제와 정치적 상하관계를 맺고 있던 수장세력의 무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독자세력이라는 주제는 정체성 만들기지역 자존감을 한층 높여준다. 그래서 이에 몰입된 학자나 일반인, 나아가 지자체의 문화 정책 수립에 매력적인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지역사는 당대 역사의 흐름과 동떨어진 채, 마치 갈라파고스의 섬처럼 고립되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오류가 고착되면 비역사적 환상이 심어지고, 자칫 또 하나의 역사왜곡이 될 수 있다. 고대사 자료의 객관적 해석을 위해서는 이미 80년 전에 단재 신채호가 제시한 조선상고사의 역사론을 다시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른 의견>

 

  나주 반남고분 중  덕산리 3호분은 길이(지름) 45m, 높이 8m인데, 이는 지름 20m, 높이 7.7m인 백제 무령왕릉보다 훨씬 크다. 이 정도 규모의 무덤이라면 봉토를 쌓는데 5천 명 이상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고 짐작된다.  백제와 정치적 상하관계를 맺고 있던 세력이 과연 이렇게 봉분의 크기가  거대한 수장의 무덤을 쌓을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무덤   외형상의  크기나 축조 방식의 차이로 보아 필시 백제와는 독자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마한 세력이 남긴 고분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또 아파트형 고분으로 잘 알려진 나주 복암리 3호분의 경우에도, 6세기 중엽 백제 계통의 후기 석실분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영산강 유역 마한 집단이 독립된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영암 최대 고분인 내동리 쌍무덤에 안치된 피장자의 지위도 나주 신촌리 고분의 피장자와 더불어 영산강 유역 마한 소국의 최고 귄력자라는데 이견이 없는 것같다.

 

호남은 언제 백제가 됐을까(출처 중앙일보 2021.8.1)


정작 학계에서는 호남이 백제에 편입된 것이 온조의 건국(BC 18년)에서 수백 년이 지난 후라고 본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수도만 서울-충청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호남은 백제의 긴 역사에서 절반 정도만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호남이 백제의 영토에 들어오게 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요.

①4세기: 근초고왕의 정복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이어서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게 하사하였다. 이에 그 왕 초고 및 왕자 귀수도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일본서기』 진구기(神功紀) 49년조의 기록입니다. 『일본서기』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쓰이는 등 일본 중심적으로 윤색된 것이 적지 않아 100%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삼국 관련 기록이 많기 때문에 고대사의 숨겨진 '퍼즐 조각'을 제공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진구기 49년의 기록도 한국 사서에서 볼 수 없는 백제의 한반도 남부 진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백제왕 초고는 근초고왕, 왕자 귀수는 근구수왕이 유력합니다. 일본이 백제에 ‘하사’했다는 침미다례는 해남이나 강진으로 추정됩니다. 또 스스로 항복한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4읍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대개 전주와 김제 등 전북 일대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기록은 백제가 근초고왕 시절인 4세기 중반 호남에 진출했다는 정보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남해안을 확보한 백제는 이때 일본과 바닷길로 이어지면서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게 됩니다.
②6세기: 사비(부여) 천도 이후
그런데 백제의 호남 진출이 이보다 늦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근래 진행된 발굴조사에 따르면 6세기 중엽까지도 옹관묘 등 백제와 다른 독자적 무덤양식이 영산강 일대에서 나타난다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고고학계에서는 6세기 중반까지 전남 일대에 백제 아닌 독자세력이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일각에선 백제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간 마한 세력이라고도 봅니다. 이 입장을 취하면 호남이 백제에 속했던 것은 불과 100년 안팎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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